브레히트 자신의 글들에서는 물론이고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서사극의 창안자가 누구냐?"는 논쟁이 있어왔고, 오늘날 서사극을 접하는 연구자나 독자들도 자기가 보고 읽은 만큼 주장하고 있음을 본다. 두 사람이 같은 시절 베를린에서 절친으로 공동작업을 했으며, 망명 중에서 끝없이 함께 공동 작업을 하고자 했었다. 특별히, 서사극이란 개념에 브레히트가 독보적으로 부각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본 eBook은 교양 시리즈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서사극」이란 개념의 창안에 관하여 20년대에 브레히트와 피스카토르 사이에 「서사적 희곡 Das epische Drama」과 「서사극 Das epische Theater」이라는 용어의 창안자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는데, 「서사극」에 관한 언급을 브레히트보다 앞서 했다는 피스카토르의 주장은 문학사적으로 근거가 정확치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1945년경 브레히트 스스로가 이에 관해서 아래와 같이 강조하여 언급함으로써, 그 논쟁 자체가 불필요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브레히트 자신이 "두 사람중에 '누가 서사적인 공연 기법을 발견했느냐'는 문제로 피스카토르의 추종자들은 아우그스부르크 사람의 추종자들과 오랫동안 다투었다. 사실은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 다른 도시에서 이것을 사용했다. 피스카토르는 더 무대적인 면에서 (현수막, 합창, 필름등의 사용을 통해서), 아우그스부르크 사람은 희곡 양식면에서 사용했다" (GBA 22, 794)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 자신의 위와 같은 표현은 "서사극, 과연 브레히트만의 창조물인가?"라는 질문에 충실히 답하고 있다고 보겠다. 그 답은 다음의 피스카토르의 표현을 빌리면 더욱 더 분명해진다. 즉, 1959년 7월 28일 만하임에서 개최된 제 32회 "무대기술 Bühnentechnik에 관한 회의"의 기조 연설에서 피스카토르가 「서사극」의 발전과 형성에 관해서 분명하게 - “「서사극」은 나에 의해서 주로 무대에서, 브레히트에 의해서 희곡에서 발견되었다” (피스카토르 1977, 177)고 요약하고 있다.
위의 두 언급으로 「누가 먼저냐」하는 논쟁의 여지는 최소한 배제되었고, 「서사극」은 무엇보다도 그 당시 시대정신과 사회상을 무대에 나타내고자 노력하였던 전 연극인들의 "공동작업 Kollektivarbeit" - 브레히트가 흔히 잘 표현하듯 - 의 결과로 보아야 하겠다.
재독 독문학자이자 연극 전공자이자 시인인 저자는
경주시 출생, 대구고와 성균관 대학 독문학과 졸업후
독일 괴팅겐 대학과 칼스루에 대학에서 독문학/사회학 전공
브레히트 100주기를 위해 1988년부터 브레히트 전집 전산화 작업
“마르가레테 스테핀 프로젝트“를 기획 운영
1998년 “브레히트 컴퓨터 인덱스 2000“ (BCI2000) 완성
“브레히트와 동양 연극“에 대한 다수 논문 발표
(주) 에바다 사장 역임, 독일 시의회 외국인 자문의원
사이버 묵상편지 “그리스도의 편지“ 저자 (2003년 - ),
미국 "필라복음신문“ 편집자, 시인, 번역가로 활동
현재, 인문과학 분야 디지털 콘텐츠 사인 “BRECHTCODE“ 운영.
현재 저자의 저서와 역서들이 ebook으로 판매되고 있음.